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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자취 뒷받침한 현자의 품격”, 제갈량考(下)

  • 기자명 김선태
  • 입력 2021.06.03 18:00
  • 수정 2021.06.04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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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0일 제갈량의 63대손으로 알려진 주거쯔치(諸葛梓岐, 제갈재기)가 홍콩 재벌 2세와 결혼해 화제가 되었다. 베이징에서 태어나 6세 때 캐나다에 이민 간 뒤 중국으로 되돌아온 주거쯔치는 홍콩에서 모델로 활동하다 노래방기업 뉴웨이(Neway) 집안의 둘째 아들 쉐자린(薛嘉麟)과 혼례를 치른 것으로 알려졌다.

결혼식 당시 주거쯔치는 큰 키와 빼어난 외모로 해외 언론의 주목을 받았는데, 이를 두고 홍콩인들은 “역시 제갈량의 피는 못 속인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다.

주군에게 한없이 충직, 법과 원칙에 한없이 엄격
제갈량은 팔척장신에 풍모가 빼어났다는 것이 당대 사료들의 일치된 견해다. 여명협은 『제갈량 평전』에서 융중에 은거할 당시 제갈량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공명은 17세 때 융중에 은거해 27세가 되어 떠났는데 (...) 키가 8척이나 되고 용모에 위엄이 있었으며, 말과 식견이 보통사람과 달라 당시 사람들이 범인이 아니라 여겼다.”(77쪽)

그밖에도 제갈량의 용모에 대해 “백옥 같은 피부에 흰 학창의와 백우선을 가진 모습이 신선과 같다”는 기록이 있다. 달리 제갈량은 깡마른 체구에 피부는 말라비틀어진 나무껍질 같았으나 눈빛에 힘이 있으며 기품이 넘쳤다는 기록도 있다.

유비가 제갈량을 세 차례나 찾아가 기어이 영입하자 관우와 장비가 불만을 품었는데, 유비가 그들에게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격(水魚之交)’이라고 하여 불만을 눌렀다. 이에 후일 수많은 동반자가 자신들의 관계를 이 성어로 표현하게 되었다.

그런 제갈량은 주군에게는 한없이 충직했으며 법과 원칙에는 한없이 엄격했다. 제갈량의 충직함에 관해서는 많은 증거가 있는데, 226년 촉한 후주 유선의 조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승상 제갈량은 너그럽고 도량이 크며, 강직해 비굴하지 않고 충정과 대담한 지략을 모두 구비한 인물로, 자신을 돌보지 않고 전심을 다 해 나라를 위하니, 선제(先帝, 유비)는 천하 대사를 모두 그에게 위탁했고, 그 후 그는 모든 책략으로 짐을 도왔다.”
 
제갈량 자신이 남긴 글 가운데 『삼국지 촉지 이엄전』에 실린 다음 문장은 유비에 대한 그의 평생에 걸친 충성심을 잘 보여준다. 당시 이엄이 “제갈량에게 구석(九錫)을 하사해줄 것”을 후주에게 소청하자, 이에 답한 서한의 일부다.

“나는 원래 동쪽 지역(서주 낭야군)의 하찮은 사람이었는데, 선제의 과분한 신임을 얻고서 직위는 신하로서 최고까지 올랐고, 봉록과 포상은 백억(百億)이 넘습니다. 지금 조위 도적들을 토벌하는데 그 성과도 이루지 못했고, 나를 알아준 선제께도 아직 보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제 환공이나 진 문공처럼 자신을 귀하게 여겨 높은 자리에 앉는다면 이는 의가 아닙니다. 만약에 조위를 멸망시키고 조예(위왕, 문제 조비의 아들)를 주살해서 황제께서 원래의 도읍지로 환도한다면, 그때는 나와 동료들이 함께 승진할 것입니다.”

법과 원칙의 문제에 이르면 제갈량의 다른 면모가 나타난다. 제갈량은 223년에 쓴 「정의를 논하다」에서 고대 병서 군계(軍誡)에 이른 “만인이 필사(必死)의 마음을 갖고 있다면 천하에 행할 수 없는 일은 없다”는 말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는다고 했다.

이는 제갈량 자신의 일상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는데, 가령 생질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다짐하고 있다. 

“잠시 관직에 오르지 못한다고 해서 어찌 자신의 고아한 정취를 훼손하겠는가? 또한 어찌 일들이 성공하지 못할 것을 근심할 것인가? 만약 뜻이 강인하지 못하고 기개가 강개(慷慨)하지 못해 헛되고 평범하게 세속에 머무르거나, 혹은 탐욕스럽게 사사로운 정에 얽매인다면 영원히 평범한 삶에 매몰되어 그 미천함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 말대로 제갈량은 강인한 의지력으로 법과 원칙을 냉혹하게 적용했다. 자신의 친구인 마량의 동생 마속을 울며 처형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국정의 동반자였던 법정(法正)이 나서서 우려를 전하자 제갈량은 “은혜와 영화가 동시에 가지런해야 상하에 법도와 질서가 생기는 것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핵심은 바로 여기에서 나타나는 것”이라 답했다. 

『제갈량 문집』= 제갈량 지음. 조영래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제갈량 문집』= 제갈량 지음. 조영래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진수 역시 『삼국지 제갈량전』에서 정사에 임하는 제갈량의 자세를 극찬하며 이렇게 썼다.

“제갈량은 충의을 다하고 시대에 이로움을 준 사람에게는 비록 원수라도 반드시 상을 주고, 법을 어기고 태만한 자에게는 비록 가까운 사람이라도 반드시 벌을 주었다. 죄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마음을 가진 이에게는 무거운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풀어주었으며, 진실을 말하지 않고 말을 교묘하게 꾸미는 자에게는 비록 가벼운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사형에 처했다. 선을 행하면 작은 일이라도 상을 주지 않은 적이 없고, 사악한 행동을 하면 사소한 것이라도 처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촉나라 안의 사람은 모두 그를 존경하고 아꼈으며, 형법과 정치가 비록 엄격해도 원망하는 이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마음을 공평하게 쓰고 상벌의 기준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라고 진수는 평했다. 

“마음이 깨끗해 뜻이 밝고, 마음이 평온해 널리 이루다”
전반적으로 제갈량의 법 집행은 엄격하나 공명정대했고 잘못을 저지른 자에게도 늘 기회를 주어 당사자들이 마음으로 승복하게 했다. 이에 관해서는 진나라 대학자 습착치가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옛날 관중이 백씨의 병읍 삼백을 빼앗았으나 백씨가 죽을 때까지 원망하지 않아 성인도 그것을 어렵게 생각했다. 제갈량은 요립에게 눈물을 흘리게 하고, 이엄을 죽음에 이르도록 했으니, 어찌 단지 원망에서 그러했다고 말할 수 있으리오.”

요립은 장사군 태수로 방약무인한 행동이 도를 넘어 제갈량에 의해 문산군으로 유배되었다. 얼마 뒤 대신들이 그의 사면을 건의하자 제갈량이 “양이 양의 무리를 문란케 하는 것도 양을 해치는 것이다. 그런데도 요립을 높은 직위에 둔다면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진위를 구별할 수 있겠는가?” 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후일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병사했다는 말을 듣고 요립은 제갈량에게 인정받을 수 없게 됐다는 생각에 “내가 끝내 오랑캐가 되고 말게 생겼구나” 하며 통곡했다.

제갈량은 또한 자신을 모함해 북벌 실패의 책임을 피하려 하던 표기장군 이엄을 평민으로 삼고 재동군으로 유배시켰는데, 이엄은 제갈량의 죽음을 듣고 귀양지에서 비통해하다 화병으로 죽었다. 

제갈량이 공명정대하므로 언젠가 다시 기회를 얻어 복귀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차에, 그가 죽으니 다시는 그와 같은 흉금과 식견을 기대할 인물이 나지 않으리라 여긴 탓이다.

제갈량은 사후 자신의 유언대로 한중의 정군산에 매장되는데, 생전 청렴하고 축재를 하지 않아 집에는 뽕나무밭과 척박한 농토 약간이 남았다. 그가 후주에 올린 표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신이 처음 선제를 모실 때, 높은 관직을 주시어 스스로 생업에 힘쓰지 않아도 되도록 하셨습니다. 이제 성도에 뽕나무 800 그루와 척박한 땅 1500무가 있으니, 자제들이 먹고 입는 데 부족함이 없습니다. (중략) 만약 신이 죽는다면, 안으로 남는 비단이 없게 하시고 바깥으로 남는 재산을 없게 하시어 폐하께 부담을 주지 않도록 하길 원하나이다.”

그가 죽으니 생전의 청렴함이 그가 말한 대로 입증되었다.

제갈량은 인간관계에 신중했지만 한 번 맺은 우정은 평생 유지했으며 재상이 된 뒤에도 은둔 시기의 벗들을 격의 없이 만나 의견을 물었다. 제갈량이 쓴 ‘태평어람’이라는 글에 이러한 교류관이 잘 나타나 있다.

“권세와 재물로 사귄 벗은 오래 갈 수 없다. 사인(士人)의 교우 관계는 마치 날씨가 따뜻해도 꽃을 더 피우지 않고, 날씨가 서늘해도 나뭇잎이 시들지 않는 것과 같다. 이러한 우정일수록 사시사철 모두 쇠락하지 않으며 온갖 어려움을 통해 더욱더 견고해지는 법이다.”

제갈량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전장에서 죽었지만, 그가 남긴 업적은 후대 중국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생전 유비 휘하에서 주군을 대리했고 승상의 지위에서 11년 동안 정사를 펼치면서 공사 양면에 걸쳐 많은 양의 글을 주고받았다. 그의 능력과 인품에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운 것도 무수한 문헌이 남아 그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그가 남긴 수많은 문장 가운데 출사표와 계자서(誡子書)를 단연 백미라 보고 있다. 출사표는 앞서 여러 차례 언급되었고, 계자서는 마지막 북벌에 나선 제갈량이 아들 첨에게 학문하는 자세를 가르치기 위해 쓴 편지글 형식의 유훈이다. 아래는 그 일부.

무릇 군자의 삶이란
고요한 마음으로 몸을 닦고 검소함으로써 덕을 기르는 것이다.
마음에 욕심이 없어 담박(澹泊)하지 않으면 뜻을 밝힐 수 없고,
마음이 안정되지 않으면 원대한 이상을 이룰 수 없다.
배울 때는 반드시 마음이 안정되어 있어야 하며,
재능은 반드시 배움을 필요로 한다.
배우지 않으면 재능을 발전시킬 수 없고,
마음이 고요하지 않으면 학문을 성취할 수 없다.
방자하고 오만하면 정밀하고 미묘한 이치를 깊이 연구할 수 없고,
조급하고 경망하면 자신의 본성을 제대로 다스릴 수 없다.
이치를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본성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사이에
나이는 시간과 함께 달려가고, 의지는 세월과 함께 사라져
마침내 가을날 초목처럼 될 것이다.
그때 가서 곤궁한 오두막집에서 슬퍼하고 탄식해본들 어찌할 것인가?

‘담박’이라는 표현은 맑은 마음가짐, 풀이하여 깨끗하고 고요함을 유지해 스스로 담담함을 이루는 경지를 뜻한다. 

후에 청나라 황제 강희제는 1703년 허베이성 청더시에 피서산장이라는 여름 별궁을 짓기 시작했는데, 그 본관에 해당하는 정전이 담박경성전이라 불린다. 이곳에 강희제가 친히 ‘담박경성(澹泊敬誠, 담백하고 검소하며 욕심 없이 백성을 공경하고 통치하라는 뜻)’이라 쓴 편액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강희제 역시 제갈량의 계자서를 지침으로 삼았던 것이다.

계자서에서 비롯한 ‘담박명지 영정치달(澹泊明志 宁静致远) 즉 “마음이 깨끗해야 뜻이 밝아지며, 마음이 평온해야 널리 뜻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은 제갈량 사유의 심원한 경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오늘날 중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경구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글·김선태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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