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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산불과 우리가 만들어야 할 ‘국가’

  • 기자명 김선태 기획위원
  • 입력 2019.04.08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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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청이 강원도 고성 산불에 3단계 대응을 발령하고 전국 차원에서 소방차 출동을 지시한 4일 밤 강원도 홍천 서울-양양고속도로 위로 강원도 고성으로 향하는 중앙119 구조본부 차량이 지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김도훈 기자

 

강원 산불과 ‘국가’의 등장

지난 4월 4일 강원도 고성 인제 등에서 발화된 산불이 순식간에 영동 산간 지대로 확산되었고, 다수 해안 도시까지 위협하며 수많은 민가와 축사 공공기관을 불태우는 등 역대급 피해를 남기며 진화되었다. 정부는 피해 지역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고 수십 대의 헬기와 800여 대의 소방차, 1만여 명의 인력을 투입하는 등 관련 국가 자원을 총동원하여 대응했다.

강원 산불이 이처럼 단기간에 대규모 피해를 남긴 것과 관련, 전문가들은 지구온난화로 대기 기온이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지표면의 기온이 오르면 수분 증발량이 많아지고 건조한 날씨가 이어지는데 이것이 산불의 빈번화·대형화·장기화 가능성을 높인다는 설명이다. 이에 따라 정부로서는 이번과 유사한 봄철 대형 산불이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다는 점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게 되었다. 

특히 이번 재난은 그 심각성이 화급을 다투는 수준이어서, 심지어 야당 일각에서조차 일시 정쟁을 중지하고 정부 조치에 협력하자는 목소리가 나올 지경이었다. 그런데 향후 구조적 요인으로 대형 재난의 발발 가능성이 높아질 뿐만 아니라 이를 국가의 항상적인 대처와 개입으로써만 해결할 수 있다면, 과연 우리에게 국가는 어떤 존재인지 한 번쯤 되짚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서구 국가들이 왕정이나 제정 등 기존 체제를 자체적으로 또는 외압에 의해 극복하며 공화국으로 이행한 것과 달리, 우리는 일제 치하에서 외세에 의한 분단을 겪으며 기존 체제 없이 근대 공화국을 수립했다. 이처럼 기존 통치 기구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 없이 급조된 탓에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서 국가의 이미지는 통치자의 성격에 따라 극단적인 왜곡을 겪어왔다. 

미 군정에 의해 이식된 것이나 다름없는 이승만 정권이 왕조 체제의 성격을 띠게 된 것이 이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는 근대 국가의 외형과 지속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1960년 4·19 시민 혁명으로 붕괴하고 말았다. 

4·19 혁명은 밑으로부터 시민의 힘으로 전제적인 정부를 전복했다는 점에서 프랑스대혁명이나 중국 신해혁명과 같은 전형적인 근대 혁명의 양상을 지닌다. 이들 혁명의 공통점은 기층 민중의 주도하에 전제 통치에 대항하여 자유를 확대하고자 봉기한 점에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이들 혁명으로 재건된 국가들은 한결같이 국민의 자유 신장을 핵심 기치로 삼았다.

 

자유에서 공포로, 이어 이념의 담지자로

이렇게 4·19 혁명은 자유의 극한을 만끽하게 해주었지만 겨우 1년 뒤 도발된 박정희 일당의 군사 쿠데타는 그렇게 획득된 시민의 자유를 단숨에 박탈했다. 이어 구성된 제3공화국은 군사력으로 뒷받침되는 공포통치 기구로 국가의 성격을 재편했다. 당시 자유를 박탈당한 개인이 처한 무기력함에 대해, 시인 김수영은 「누이야 장하고나!」라는 시에서, 죽은 동생의 사진을 보고 ‘우스운 것이 사람의 죽음이다’ 생각하며, 이렇게 적었다. 

 

누이야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다

 

이를 두고 평론가 김현은 “혁명과 비애라는 자유의 두 극단을 다 같이 체험한 시인에게 자유는 큰 짐이 된다”라고 적었다. 황동규 시인은 이를 ‘자유와 혁명의 길항 관계에서 오는 고뇌의 노래’라고도 설명했는데, 그 길항 관계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군사 정권이 재집권에 성공하여 점차 국가가 직접적으로 개인의 삶에 개입하기 시작하자, 대부분의 개인들은 자유는 고사하고 일상의 공포로 국가를 대하기에 이르렀다. 

윤흥길의 단편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는 이처럼 국가가 개인을 직접적으로 통제할 때 벌어지는 비극적 상황을 그린 작품이다. 이야기는 동네 순경이 새로 이사하는 권 씨라는 사람의 집주인을 찾아가 권 씨의 동태를 보고하라고 강요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국가가 곧 무소불위의 물리력이며 자신이 그 대행자라는 이유에서, 순경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당한 어조로 아래와 같이 말한다. 

 

- 조금도 부담감 같은 걸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매일매일 무슨 보고 형식을 취할 것을 의무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약간 특별한 동태가 보일 때, 가령 (…) 쌀이나 연탄이 떨어져서 굶는다든가 갑자기 많은 돈이 생겨서……

(윤흥길 「아홉 켤레의 구도로 남은 사내」 중)

 

얼토당토않게 시위주동자로 낙인찍혀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어려워져 공사판 막노동자 신세로 떨어진, 심지어 생계가 막다른 골목에 몰려 저지른 강도짓조차 변변히 못해 실패하고 도망가는 권기용이라는 소시민을, 보호관찰이라는 명목으로 국가가 그를 일상적으로 감시한 경우였다. 결국 박정희의 통치 기간 국가는 군대·경찰·감옥·행정기관으로 대표되는 통제와 감시 기구의 이미지를 개인들에게 생생하게 각인지웠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12·12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저항하는 개인들에게 직접적으로 군사력을 행사했으니 그것이 곧 광주 학살이다. 이제 국가는 군대를 내세운 지배기구에 다름 아니라는 이미지까지 획득하게 되었지만 그 또한 근대 시민 국가의 성격과 배치되는 것으로 시민의 항쟁에 부딪혀 좌초할 수밖에 없었다. 민간 정부로의 이양은 시간문제였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이 모든 과정에 남북 분단이 상수로 작용하고 있어서 가까스로 들어선 민간 정부 역시 분단에 따른 좌우 이념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때문에 김영삼 정부의 과도기를 거쳐 김대중 정부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가는 기존의 공포 이미지를 벗는 대신 이념의 담지자라는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이념의 과잉은 정치의 편향을 낳게 되고 그에 따라 다양한 국가 본연의 의무를 방기하는 결과를 낳게 마련이다. 원래 모든 국가는 그 존속을 위하여 사회의 구조적 문제 해결에 나설 수밖에 없다. 그중에서도 구조적 빈곤의 증대, 성 또는 약자에 대한 차별, 공공 안전의 위협 등은 오직 국가만이 대처할 수 있는 문제다. 

이런 문제를 방기하면서 국가가 장기간에 걸쳐 이념 편향적 대처에 머무를 경우 사회는 공정성을 상실한 채 당장 드러나지 않더라도 여기저기서 조금씩 썩고 하부로부터 붕괴해 간다. 이런 맥락에서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장기간에 걸쳐 구조화된 성차별이 한 여성의 내면을 파괴하는 과정을 심리 상담 일지라는 형식으로 담담히 기록하고 있다. 김지영은 2011년 대학을 졸업한 뒤 중소규모 홍보대행사에 입사해 나름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얼마 뒤 회사에서 새 기획팀을 만들고자 인원을 선발하는데 김지영은 충분히 능력이 됨에도 불구하고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배제되고 만다. 다음은 탈락의 고배를 마신 김지영이 남긴 술회.

 

- 사업가의 목표는 결국 돈을 버는 것이고, 최소 투자로 최대 이익을 내겠다는 대표를 비난할 수 없다. 하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효율과 합리만을 내세우는 게 과연 공정한 걸까. 공정하지 않은 세상에는 결국 무엇이 남을까. 남은 이들은 행복할까.(조남주, 『82년생 김지영』, 123쪽)

 

작가는 여기에 “(통계에 따르면 당시) 대한민국은 OECD 회원국 중 남녀 임금 격차가 가장 큰 나라”이자 “여성이 일하기 가장 힘든 나라로 꼽혔다”라는 말을 덧붙인다. 김지영이 말하는 ‘공정’의 최종적 책임자가 국가임은 부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국가의 과제는 진화를 멈추지 않는 것

국가가 이념 대결의 담지자로 남아 있는 한 이런 구조적 문제는 날이 갈수록 심화될 뿐이고, 그 결과가 매우 비극적일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급기야 2014년 박근혜 정부는 밝혀지지 않은 어떤 이유로 거대 재난에 대한 본연의 책임을 회피함으로써 세월호 참사라는 최악의 비극을 낳았고, 그 결과 정권 자체가 붕괴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분단 체제하에 있는 우리의 경우 좌우 이념의 담지자로서 국가의 이미지는 여전히 강력하고, 이를 극복할 방법 또한 마땅하지 않다. 낭만적인 희망에 그치기 쉬운 혁명적 전복이나, 그 실현 여부가 불투명한 통일의 도래를 논외로 한다면, 유일한 해결책은 이념을 넘어서는 국가적 과제로 국민을 하나로 묶는 일이다. 이번 강원 산불에 전례 없는 규모로 신속한 국가적 대처가 이루어졌고, 여야 정치 세력이 일시나마 정쟁 중단을 언급하며 공조한 사실을 중시하는 이유다. 

플라톤과 공자 이래 국가의 본질과 역할 나아가 한계에 관해 수천 년간 논의가 있었지만 분명한 점 하나는 문명이 유지되는 한 국가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더 큰 국가나 더 작은 국가, 더 많은 국가나 더 적은 국가는 있어도 국가가 없는 사회는 존속할 수 없었다. 그것을 계급 지배의 도구라 부르든 공공재의 공급자라 부르든, 국가는 단순히 이웃 국가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상대적으로 존재하며 따라서 절대적으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국가를 더 나은 국가로 진화시키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 이미 우리는 전제 정부를 타도하고 군사통치를 와해시키며 지금까지 국가를 진화시켜 왔다. 이념의 담지자를 뛰어넘어 더 나은 국가로 대한민국을 진화시킬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함을, 믿고 또 믿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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