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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말한다 – 6] 法頂, "난초 하나라도 집착은 괴로움"

'무소유', 저자의 순결한 삶으로 더욱 빛나는 이 시대의 고전

  • 기자명 김선태
  • 입력 2020.11.20 00:01
  • 수정 2020.11.21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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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가르치려는 건 종종 무모한 시도임이 확인되지만 인생을 배우려는 건 종종 불가피한 시도임이 확인된다. 자신의 인생담으로 하루아침에 유명세를 떨쳤다 어느 순간 환멸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삶이 세상의 모범이라는 착각에 빠진 채 살았기 때문이다. 

인생을 배운다는 건 무엇일까. 필자는 2010년 3월 하순, 법정 스님이 입적했다는 말을 듣고 홀린 듯 그가 마지막 머문 불일암을 찾아 넋을 놓아버렸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스님의 남은 흔적에서라도 배우고자 한 일개 필부의 간절하고도 불가피한 시도였다. 

누군가 자신을 말할 때 그 말의 참됨은 그의 삶 즉 행동과 실천으로 입증된다. 스님은 무소유의 삶을 말하고 이를 당신의 삶을 통해 입증한 이다. 종교의 유무와 이념의 차이를 떠나 뭇 사람들이 그이를 사랑하는 이유다.

그러한 법정 스님이 남기고 간 많은 책 가운데 유독 빛나는 책인 '무소유'. 이 책은 일상의 단편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수정처럼 빛나는 경구들을 필자의 가슴에 남겼다. 그러한 경구 하나하나를 곱씹는 동안 필자는 거듭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곤 했다.

해서 필자는 10년 전 잠시 불일암에 머물렀던 순간들을 사진으로 돌아보며 ‘무소유’의 경구들을 일부나마 되짚어 보고자 한다.

불일암으로 이어지는 대나무 숲길. / 사진=필자
불일암으로 이어지는 대나무 숲길. / 사진=필자

1. 선의지에 대하여

“내가 인정할 수 있는 인간의 우월성은 선의지뿐”('미리 쓰는 유서' 편)

스님은 인간의 선(善)의지 이것밖에는 인간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고 적었다. “온갖 모순과 갈등과 증오와 살육으로 뒤범벅이 된 인간의 촌락에 오늘도 해가 떠오르는 것은 오로지 그 선의지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스님은 자신이 세상을 하직하기 전에 먼저 인간의 선의지를 저버린 일을 참회하고 싶다 말했다.

스님은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며, “죽을 때에 가진 것이 없을 것이므로 무엇을 누구에게 전한다는 번거로운 일도 없을 것”이라며 즐거워했다. 그래도 혹시 즐겨 읽던 동화책 몇 권 남는다면 아침저녁으로 “신문이오” 하고 당신을 찾아준 꼬마에게 주고 싶다며. 아마 그 동화책 가운데 한 권은 ‘어린 왕자’일 것이다.

법정 스님을 기리는 이들이 시주한 기왓장들 / 사진=필자
법정(法頂) 스님을 기리는 이들의 기와불사. / 사진=필자

2. 이웃에 대하여

“사람은 각자의 투명한 영혼으로 타인과 친해진다.”

스님은 사람끼리 친근해질 수 있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거죽이 아닌 내면의 투명한 영혼이 서로 연결된 결과라고 적었다. 친한 사람끼리 뒷날 다시 만나는 것도 이때의 인연 덕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한번 만난 사람들은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며, 이때 타인은 결코 무연한 존재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나의 분신임을 알 수 있다.”(‘진리는 하나인데’ 편)

법정 스님 입적 당시 불일암 전경. / 사진=필자
법정 스님 입적 당시 불일암 전경. / 사진=필자

3. 이해에 대하여

“온전한 이해는 지혜의 눈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

우리는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가 상대방을 이해하노라고 입술에 침을 바른다. 그러한 순간에서 영원을 살고 싶어 한다. 그 이해가 진실한 것이라면 항상 불변해야 할 텐데 번번이 오해의 구렁텅이로 떨어져 버린다.”

스님이 보기에 “자기 나름의 이해란 곧 오해의 발판”이다. 우리 각자는 하나의 색맹에 불과한 존재에 불과한데 이를 알지 못한 채 또 다른 색맹인 타인을 향해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안달하곤 한다. 그리하여 연인들은 서로 자기만이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맹신에 빠져 오해의 안개 속에서 헤매는 것이다.

스님이 말한다.

“오해란 이해 이전의 상태이다. 실상은 언외에 있는 것이고 진리는 누가 뭐라 하건 흔들리지 않는 법. 온전한 이해는 그 어떤 관념에서가 아니라 지혜의 눈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 이전에는 모두가 오해일 뿐.”(‘오해’ 편)

“우리는 하나의 대지로 맺어진 불가분의 존재”

스님은 “모든 오해는 저마다 자기 집에만 갇혀 있는 데서 오게 마련”이라고 부연한다. “우리 각자가 굳게 닫았던 문을 열고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 서로가 형제임을 마음속으로부터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스님이 말한다.

“만남은 일종의 개안일 수 있다. 만나 이야기함으로써 오해의 장막이 걷히고 인식의 들녘이 열리며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영역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저마다 외롭게 떠 있는 섬이 아니라, 같은 대지에 맺어져 있는 불가분의 존재임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진리는 하나인데’ 편)

불일암의 법정 스님 영정. / 사진=필자
불일암의 법정 스님 영정. / 사진=필자

4. 용서에 대하여

“용서란 흐트러지려는 나를 거두어들이는 일”

어느 날 스님이 큰 법당 예불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방문이 열려 있었다. 평소에 잠그지 않는 방이라 도(盜) 선생이 무사통과해버린 것이다. 며칠 뒤 스님은 시계를 사러 시내에 갔다. 하필 시계방에 스님의 시계가 놓여 있었는데 그걸 두고 웬 사내가 주인과 흥정 중이다. 스님은 그 사내에게 돈 천 원을 주고 자신의 시계를 샀다.

스님이 말한다.

“용서란 타인에게 베푸는 자비심이라기보다, 흐트러지려는 나를 나 자신이 거두어들이는 일이 아닐까 싶다.(‘탁상시계 이야기’ 편)

불일암의 법정 스님 영정. / 사진=필자
불일암의 법정 스님 영정. / 사진=필자

5. 침묵에 대하여

“침묵은 참말을 위한 것, 말해야 할 때 피하지 말아야”

“말은 의사소통의 구실을 하지만 때로는 불필요한 잡음의 역기능도 동시에 하고 있다. 구시화문(口是禍門), 입을 가리켜 재앙의 문이라고 한 것도 그 역기능을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침묵은 침묵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침묵을 여과지 삼아 오직 ‘참말’만을 하기 위함이다.

스님이 말한다.

“마땅히 입 벌려 말을 해야 할 경우에도 침묵만을 고수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미덕이 아니라 비겁한 회피인 것이다.”(‘침묵의 의미’ 편)

“인간은 침묵 속에서 자기 존재를 자각한다.”

스님은 “외부의 소음으로 인해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은 현대인의 비극”이라 적었다. 인류의 행동반경이 구만리 달나라에까지 확대됐다 할지라도 우리가 구심점을 잃는다면 우리의 행동은 충동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스님은 심지어 우리가 주고받는 대화도 하나의 소음일 경우가 많은데, 이는 그 소음을 매개로 하여 새로운 소음을 마련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스님은 말한다.

“인간의 말은 마땅히 침묵에서 나와야 할 것이다. 인간은 침묵 속에서만이 사물을 깊이 통찰할 수 있고 또 한 자기 존재를 자각한다.”(‘소음기행(역마기행)’ 편)

툇마루 아래 고무신과 의자. / 사진=필자
불일암 봉당 위 고무신과 벽에 기댄 의자. / 사진=필자

6. 집착에 대하여

“인정에 대한 집착이야말로 참으로 질긴 것”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란 본래 한 물건도 없다는 뜻이다. 인간의 모든 소유물은 세상에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이 아니며, 세상을 하직할 때 가져갈 수도 없다.

스님은 이를 두고 “인연 따라 있었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고 마는 것”이라 적었다.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마음이란 너그러울 때는 상대방의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다가 한 번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미묘해진다.

이 미묘함은 인정에서 비롯하고 인정은 다시 집착을 낳으며 집착이 증오와 파멸을 부른다.

스님이 말한다.

“인정이 많으면 도심이 성글다는 옛 선사들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집착은 우리를 부자유하게 만든다. 해탈이란 온갖 얽힘으로부터 벗어난 자유자재의 경지를 말한다. 그런데 그 얽힘의 원인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집착에 있는 것이다. 물건에 대한 집착보다도 인정에 대한 집착은 몇 곱절 더 질긴 것이다.”(‘회심기’ , ‘잊을 수 없는 사람’ 편)

법정 스님이 생전 즐겨 앉던 의자. / 사진=필자
법정 스님이 생전 즐겨 앉던 의자. / 사진=필자

7. 종교에 대하여

“하나의 진리를 가지고 현자들은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다.”

고대 인도의 브라만교 경전 리그베다에 나오는 구절이다. 

스님은 이를 두고 “사실 진리는 하나인데 그 표현을 달리하고 있을 뿐”이라 설명한다. 예를 들어 스님은 가끔 성경을 읽으면서 불교의 대장경을 읽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데 그게 조금도 낯설지 않고 조금도 이질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적었다.

이에 스님은 “우리의 그릇된 고정관념 때문에 ‘빈 마음’의 상태에 이르지 못한 탓에 이해되지 않을 뿐”이라는 주석을 달았다.

스님은 말한다.

“마하트마 간디의 표현을 빌리면, 종교란 가지가 무성한 한 그루의 나무와 같다. 가지로 보면 그 수가 많지만, 줄기로 보면 단 하나뿐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하나에 이르는 개별적인 길이다. 종교는 인간이 지혜롭고 자비스럽게 살기 위해 있는 하나의 ‘길’이다.”(‘진리는 하나인데’ 편)

법정 스님이 생전 즐겨 앉던 의자. / 사진=필자
법정 스님이 생전 즐겨 앉던 의자. / 사진=필자

8. 사랑에 대하여

“사랑한다는 것은 나누어 짊어진다는 것”

스님은 얼마만큼 많이 알고 있느냐는 것은 대단한 일이 못 된다고 적었다. 아는 것을 어떻게 살리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무기력하고 나약하기만 한 ‘인형의 집’에 틀어박혀 있는 한 우리의 지식은 아무런 소용이 되지 못한다. 세상의 소금이 되려면, 세상을 위해 무언가 해내려면 먼저 그 인형의 집에서 나와야 한다.

스님은 말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함께 나누어 짊어진다는 뜻이다. 우리에게는 우리 이웃의 기쁨과 아픔에 대해서 나누어 가질 책임이 있다. 우리는 인형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다. 우리는 끌려가는 짐승이 아니라 신념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야 할 인간이다.”(‘인형과 인간’ 편)

“태곳적에 인류는 사랑하기 위해 길을 만들었다.”

사람이 산다는 게 뭘까? 스님이 보기에 삶에서 명확한 것은, 태어난 것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 뿐이다. 그러므로 내 곁의 그 누군들 순간순간을 아무렇게나 허투루 살고 싶어 하겠는가? 만나는 사람마다 따뜻한 눈길을 보내어도 모자라고, 한 사람 한 사람 그 얼굴을 익혀두어도 모자랄 판이다.

스님이 말한다.

“우리는 미워하고 싸우기 위해 마주친 원수가 아니라, 서로 의지해 사랑하려고 아득한 옛적부터 찾아서 만난 이웃들이다. 그것이 인류가 길을 만든 이유다.”(‘가을은’ 편)

법정 스님이 만든 물곳간. / 사진=필자
법정 스님이 만든 물곳간. / 사진=필자

9. 무소유의 삶에 대하여

“내 소유란 없다. 어떤 인연으로 해서 왔을 뿐.”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물건과 인연을 맺고, 종종 그 물건으로 인해 고통받는다. 무엇보다 큰 고통은 그것에 대한 소유 관념에서 비롯한다. 종종 사람들은 물건을 잃고 마음마저 잃어버린다.

스님이 말한다.

“따지고 보면 내 소유란 있을 수 없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온 물건이 아닌 바에야 나의 것이란 없다. 어떤 인연으로 해서 나에게 왔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가버리는 것이다. 더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나의 실체도 없는데 그 밖에 내 소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저 한동안 내가 맡아 있을 뿐이다.”(‘본래무일물’ 편)

“난초 하나 키워도 집착은 괴로움인 것”

수연(水然) 스님 이야기와 더불어, 아마도 이 책에서 가장 극적인 두 장면의 하나에 속할 법정 스님의 난초 이야기는 처음 읽는 독자들이 얻게 될 감동을 위해 부연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그로부터 스님이 깨닫게 된 무소유의 새로운 경지를 엿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우리는 필요 때문에 무엇인가를 소유하지만, 그로 인해 그것에 얽매이게 된다. 차츰 주객이 전도되어 많이 가질수록 많이 얽매이게 된다.

마침내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하고, 심지어 자신의 분수마저 잃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빈손으로 돌아갈 처지다. 우리 육신마저 버리고 홀홀히 떠나갈 것이다.

이어 스님은 말한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은 한 번쯤 생각해볼 말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무소유’ 편)

법정 스님이 가꾸던 밭 작물. / 사진=필자
불일암 마당에 핀 수선화. / 사진=필자

10. 자유로운 삶에 대하여

“자유는 홀로 있음을 뜻하며 그때 나는 순수해진다.”

그렇다면 스님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동안 어떤 삶을 살고 싶어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법정 스님은 이에 대해 ‘자유’와 ‘순수’라는 두 단어로 답하고 있다. 구체적인 삶의 모습도 그려 두었다. 가령 이런 것이다.

“주리면 가지 끝에 열매나 따 먹고 곤하면 바위 아래 풀집에서 잠이 든다. 새삼스레 더 배우고 익힐 것도 없다. 더러는 솔바람 소리를 들으며 안개에 가린 하계를 굽어본다. 바위틈에서 솟는 샘물을 길어다 차를 달인다. 다로(茶爐) 곁에서 사슴이 한 쌍 졸고 있다. 흥이 나면 노래나 읊을까? 낭랑한 노랫소리를 들으면 학이 내려와 너울너울 춤을 추리라. 인적이 미치지 않은 심산에서는 거울이 소용없다. 둘레의 모든 것이 내 얼굴이요 모습일 테니까. 일력(日曆)도 필요 없다. 시간 밖에서 살 테니까.”

스님이 여기에 사족을 달았다.

“혼자이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얽어매지 못할 것이다. 홀로 있다는 것은 순수한 내가 있는 것. 자유는 홀로 있음을 뜻한다.”(‘나의 애송시’ 편)

법정 스님의 삶을 먼발치에서나마 따라가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다만 그런 스님도 끝없이 솟는 자비심으로 당신을 일깨워 준 정다운 도반 수연(水然) 스님을 곁에 두는 행운이 따랐다는 점에, 필자는 다소나마 위안을 얻는다. 그 깨우침을 법정 스님은 이렇게 적고 있다.

“그는 평상심이 도(道)임을 행동으로 보였다. 한 마디로 그는 자비의 화신이었다. 그를 생각할 때마다 사람은 오래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라는 생각이 떠오른다.”(‘잊을 수 없는 사람’ 편)

불일암 앞 돌무지 /  사진=필자

글=김선태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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