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미디어협동조합 시그널

본문영역

[책은 말한다 – 5] “사람의 마음은 본시 위태로운 것”

心經附註, ‘수신의 원리’ 담은 동양 심리학의 압권

  • 기자명 김선태
  • 입력 2020.10.29 06:00
  • 수정 2020.10.29 09: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심경부주(역주) = 원저자 진덕수, 정민정. 성백효 지음. 전통문화연구회 간.
심경부주(역주) = 원저자 진덕수, 정민정. 성백효 지음. 전통문화연구회 간.

 

자기 수양의 고전, 조선 성리학에 지대한 영향

동양 고전은 수십 세기 동안 집적된 근원적 사유의 정수다. 성현들의 언행을 기록한 책이 대표적인 경우지만 때로 일정한 주제와 관련된 다양한 주장을 모아 편집한 책이 고전의 반열에 드는 경우가 있다.  

남송 시대에 복건성 천주지사를 지낸 진덕수가 지은 심경(心經)이 그 같은 경우다. 진덕수는 ‘성현’들의 어록과 주자의 해석을 발췌한 데 더해 자신의 주석을 덧붙여 이 책을 펴냈는데, 주로 채록한 경전은 사서, 삼경, 주렴계, 정이천, 범준(范浚), 주자의 글이다. 

총 37장 가운데 ‘맹자’(12장)와 ‘역경’(5장)의 비중이 크다. 심경은 마음을 다스리는 글이라는 의미다.

명나라 초기에 정민정은 이를 보완하여 심경부주(心經附註)를 펴냈는데, 원문을 보강하고 주자를 비롯해 주렴계와 정명도, 정이천, 장횡거 나아가 타 주자학파의 수양론을 대거 수록하여 그 분량이 전체의 8할 가까이 차지할 정도로 늘어났다.

퇴계 이황은 심경부주를 받아들여 자기 학문의 기초로 삼았는데, 이로 말미암아 후일 이 책은 조선 유학의 기본 경전에 편입되었다. 이후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특히 송시열로 대표되는 기호학파, 퇴계학의 맥을 이은 영남 학자들이 다양한 주석서를 펴냈다. 

이 책에 대한 조선 성리학자들의 관심과 이해가 워낙 깊어 본고장인 중국에 비해 조선 성리학자들의 주석서가 압도적으로 많다.

오늘날 심경부주는 고대 중국 경전에 수록된 ‘수기(修己)’의 사상을 집대성한 책으로 서양 근대 심리학을 압도하는 자기 수양의 고전으로 이해된다. 그 방대함과 심오함으로 인해 전체를 소개하기란 가당치 않고, 다만 여기서는 편협되나마 일부 주제를 살핀다. 

위미정일(危微精一), 수신과 정치의 요체

인심유위(人心惟危) 도심유미(道心惟微) 
유정유일(惟精惟一) 윤집궐중(允執厥中)

줄여 위미정일(危微精一)이라 하는 이 문장은 책의 첫 인용문으로 이로부터 ‘심경’이라는 말이 유래한다. 서경(書經)의 대우모(大禹謨) 편에 나오는 것으로 순(舜) 임금이 우(禹) 임금에게 양위할 때 나눈 말이라 전해진다. 대략 아래와 같이 설명된다. 
“사람의 마음은 위태롭고 도에 이끌리는 마음은 미묘하니 정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지켜야 진실로 중도를 잡을 것이다.”  

주자는 중용 서문에서 이를 두고 “천고의 성현이 서로 전수한 심법’이라 적었는데, 심경은 더 나아가 “만세의 심리학(心學)에 이것이 연원”이라 했다. 

또한 사람에게는 언제라도 “사사로운 마음과 기필하는 마음”이 싹틀 수 있으므로, 그럴 때는 “구름이 걷히고 자리가 걷히듯이 깨끗이 제거”해야 하며, 이와 달리 “사랑하는 마음과 성실한 마음이 나올 때는 봄기운에 만물이 자라듯이 길러주라”고 조언한다. 

비슷한 의미에서 시경에도 “마음을 두 가지로 하지 말라” 하였고 또 “두 마음을 품지 말고 근심하지 말라” 하였으니, 이로부터 중용의 원리가 유래한다. 

이처럼 동양의 고전은 한결같이 사사로운 개인에서 국사를 이끄는 군주에 이르기까지 마음을 바로잡는 수신의 원리를 일관되게 강조한다. 

마음을 다스림에 근본은 경(敬) 

“정자가 말하기를 ‘배우는 자는 경을 가지고 마음을 곧게 하여 함양해야 하니, 마음을 곧게 하는 것이 근본이다’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경은 학문의 시와 종의 요점’이라 하였으니 이 책(심경)에서 가르친 것은 경 한 글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때 경이란 대단한 무엇이 아니라 사량좌가 말한 그대로 “마음이 항상 깨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배움의 대상은 마음을 다스리는 이치다. 그 모든 이치를 깨닫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자세는 매사를 공경심으로 대하는 일이다. 

사람이 본심을 잃지 않고 마음을 잡아 보존하여 성인의 길로 나아가는 것과 본심을 놓아 끝내 마음을 잃어버려 광인의 길로 나아가는 것은 애초 공경심의 유무에서 나뉜다는 말이다. 

진덕수는 심경찬 편에서 성현의 격언을 뽑아 경의 가치를 이렇게 설명한다. “옛날 선민들을 살펴보건대 경으로써 서로 전수하였으니, 잡은 것은 간략하나 베풂은 넓은 것이 무엇이 이보다 더하겠는가?”

사특함(邪)을 막아 성(誠)에 도달한다

마음이 간사함(邪, 사특함)에 빠져 몸을 해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경(敬)이다. 정자는 이를 두고 주역 문언전을 인용하여, “경은 바로 사를 막는 방도이니, 사를 막고 성실함(誠)을 보존하는 것은 비록 서로 다른 일이나 또한 같은 일이다. 

천하에 하나의 선이 있고 하나의 악이 있으니, 선을 버리면 곧 악이요 악을 버리면 곧 선이다”라고 하였다. 

성(誠)이란 무엇인가? 오등은 정자의 유명한 사무사(思無邪)로 이를 설명한다. 

“정자가 말하기를 ‘생각함에 간사함이 없는 것이 성이다” 하였으니, 이때 사(邪)는 사욕과 악념을 가리킨다. 오직 천리만 있고 인욕이 없으며 선만 있고 악이 없는 것, 이것이 간사함이 없는 것이다. 간사함이 없으면 망령되지 않으며 망령되지 않은 것을 성이라 이른다.” 

간사함은 사술과 통한다. 사술에 빠진 인간이 어떻게 되는지 심경은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묘사하여 경계를 주고 있다. 

“사람이 선악의 구분을 잃으면 욕심을 따라 악행을 저지르기를 마치 광병을 앓는 사람이 불 속으로 들어가면서도 편안하게 여기는 것과 같이하니, 어리석고 미련하여 거의 금수와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번이라도 간사한 생각이 있을 때는 곧 막아 제어하는 것이 바로 스스로 속이지 않는 성(誠)이다.” 

안으로는 곧게(直), 밖으로는 의롭게(義)

주역 문언전에 이르기를 “군자가 경하여 안을 곧게 하고 의로워 밖을 방정하게 한다. 그리하여 경과 의가 확립되면 덕이 외롭지 않다”고 했다. 

정이천은 이 말을 부연하여 “경이 서면 안이 곧아지고 의가 드러나면 밖이 방정해지니 의는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요 밖에 달리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요약하면 경(敬)에서 의(義)가 나온다. 마음이 공경하면 안은 저절로 곧아지는 것이니, 이처럼 성심을 다하여 거짓이 없는 마음상태를 직(直)이라 한다. 도에 이르는 길이 달리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마음을 길러 안으로 곧게 하여 밖으로 의롭게 하는 호연지기(浩然之氣)로 나아갈 때만 가능한 것이다. 

‘안으로 곧아 밖으로 의를 세우는’ 마음의 근거는 경이니, 정자는 경을 “주일무적(主一無敵)”이라 규정했다. 주자가 이를 해석하여 “단지 마음이 딴 데로 달아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는 마음이 숙연하여 두려워하는 바가 있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장자가 “마음을 씀이 분산되지 않아야 신명에 응집할 수 있다”고 한 말도 이와 부합된다. 

경의 의미를 부연하면서 주자는 “지금 사람들은 한 가지 일이 끝나기도 전에 또 한 가지 일을 하려고 하여 마음 속이 천 갈래 만 갈래이다” 하며 한탄했는데, 이는 지금 시점의 우리에게도 꼭 들어맞는 지적이 아닐 수 없다. 

마음을 경에 두면 의를 정밀하게 하지만 마음이 경에서 멀어지면 의에서 벗어나게 된다. 안으로 혼란하고 사특하면 정처가 있을 리 없는데 어디에다 마음의 뿌리를 내릴 것인가? 당연히 시간이 지날수록 편법과 사술에 말려들게 될 것이다. 

분함과 욕심은 한 결로 발동한다.

주역의 다양한 괘 가운데 욕심을 지적한 것으로 손괘가 있다. 위에 산이 있고 아래에 못이 있는 것을 두고 손(損)으로 풀이하는데 심경에서 특히 “군자가 이것을 보고서 분함을 징계하고 욕심을 막는다”는 상전의 문장을 소개한다. 

정이천이 이를 풀어 “몸을 닦는 도리에 마땅히 덜어내야 할 것은 오직 분함과 욕심이다”라고 하여 분노와 욕심이 마음의 같은 뿌리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았다. 

공자는 일찍이 제자들에게 세상에 나아가기 전 아홉 가지 유념해야 할 사항을 가르쳤는데, 그 마지막 항목이 “분노가 치밀 때에는 뒤에 어려움이 있을 것을 생각하고, 얻을 것을 보면 의를 생각하라”는 당부다. 이 역시 분함과 욕심의 쌍생아적이고 동반자적인 관계를 지적한 것이다. 

분함은 사람을 기운으로 내몰고 욕심은 사람을 악행으로 내몰게 마련이니 이 모두 자신을 해치는 일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이를 막을 수 있는가? 정이천은 논어를 전거로 들며 “생각할 뿐이다. 오직 생각하면 이를 막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생각하여 스스로 반성할 때 지혜에 이르게 되고, 생각하여 분노를 징계할 때 선함을 깨닫는다. 

주자의 설명처럼 “욕심은 웅덩이나 못과 같아서 그 속이 더럽고 혼탁하여 사람을 오염시키는 것”이니, 그 속을 들여다보고 혼탁한 구멍을 메울 힘은 오직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경과 의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데서 찾을 수밖에 없다. 

맹자, “욕심이 많으면 보존됨이 적을 것”

몸가짐을 바로 하기 위해서는 그 몸이 감싸고 그 몸을 지탱하며 그 몸을 움직이는 마음을 바로 해야 하니 이를 두고 마음을 다스린다고 말한다. 마음을 다스릴 때 마음이 몸을 다스려 비로소 바깥세상으로 선하게 나아가는 것이다. 

세상으로 나아가게 하는 마음의 이치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주자는 의(義)와 인(仁) 두 가지를 들며, “의와 인은 하늘의 법칙이니 이들을 아무리 공경하고 받들어도 잘하지 못할까 두려울 뿐”이라며 자신에 비추어 아래와 같이 반문한다. 

“나는 이것(의와 인)을 거울로 삼아서 옥을 받은 듯이 가득한 물을 받들 듯이 조심하지만, 책임은 무겁고 갈 길은 머니 감히 혹시라도 태만히 할 수 있겠는가.”  

천지는 아득하여 끝 간 데 없고 마음이란 본디 허한 것으로 누구라도 사특함에 빠질 수 있어 항상 다른 이로부터 배워 경계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 정도가 극심하면 어쩔 것인가? 맹자는 “사람됨이 욕심이 많으면 보존됨이 적을 것”이라 했는데, 그 욕심에 끝이 없으면 무엇을 근거로 이들에게서 사람의 마음을 찾을 것인가? 

 

글=김선태 기획위원

저작권자 © 미디어협동조합 시그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