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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말한다-8] 코로나19 시대, 니체처럼 생각하기 (1)

“신은 죽었다, 하지만 意志는 인간을 위대하게 한다”

고독·고통·불운을 긍정하여 삶의 이치를 깨친 사상가 

  • 기자명 김선태
  • 입력 2021.03.10 22:53
  • 수정 2021.03.12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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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쓸 무렵의 니체, 구스타프 슐체 작, 1882. 사진=위키백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쓸 무렵의 니체, 구스타프 슐체 작, 1882. 사진=위키백과

현존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쾌락은 위험한 삶이다. 나는 스스로 본보기가 되는 바로 그런 철학자이고자 한다.”(『반 시대적 고찰』)

 

니체(1844~1900)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무수한 통찰과 지혜로 보여준, 서양 철학사상 보기 드문 인물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긍정하도록 돕기 위해 니체는 자신이 지닌 마지막 한 줌의 영혼마저 불태웠다. 

그의 방대한 저술들은 젊은 날부터 평생 이어진 고독과 육신의 고통, 그에 따른 불운 속에 이룩한 성취들이다. 그의 글들이 탁월함을 넘어 각별하고 소중하게 읽히는 이유다. 

니체의 집안과 어린 시절
니체는 1844년 독실한 루터교 가문에서 태어났다. 목사인 아버지를 진심으로 따랐던 니체는 다섯 살까지 부친의 목사관에서 자랐다. 

니체의 외가도 루터교 목사 집안이었고 당연하게도 어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들을 기독교에 귀의시키려 했다. 

니체는 말했다. “누구도 하이네와 나만큼 훌륭하게 독일어를 쓴 사람은 없다. 그런데 하이네는 유대인이고 나는 폴란드인이다”라고. 지나치게 파격적이었던 그의 저술에 보인 독일 지성계의 철저한 무시가 니체를 반 게르만주의자로 만들었을 것이라는 분석은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그의 가계는 부계와 모계 모두 전형적인 독일인 출신이었다. 유년기의 행복이 지속되었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니체가 다섯 살 되던 1849년 7월 부친 니체 목사가 세상을 떠났고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집안은 빠르게 몰락했다. 

그 충격이 너무나 커서, 10년이 지나서도 니체는 “오! 나는 귓가에 울려 퍼졌던 그 공허한 (장례식의) 종소리를 언제나 듣게 될 것이다”라고 썼을 정도다. 

이후 니체는 평생 아버지가 되길 거부했고 따라서 결혼하지도 가정을 꾸리지도 않았으며 한 군데 정착해 살지도 않았다. 

부친의 사망과 가계의 몰락은 정신적 충격을 넘어 니체의 건강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나움부르크 소년학교 시절 이미 안경을 썼던 니체는 이후로도 시력이 나아지지 않았고 말년에는 거의 장님이 되다시피 했다. 

열두 살 되던 1856년에는 두통까지 겹쳤는데 이 때문에 한동안 학교를 쉬었으며, 우리가 알다시피 이후 니체는 평생 지독한 두통에 시달린 나머지 결국 정신질환에 이르렀다.

청춘은 불쾌하다. 그때는 어떤 의미에서 보아도 생산적이라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열네 살, 포르타 공립학교에 들어간 니체는 이 말처럼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는 고전 분야를 제외한 대부분의 과목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으며 오히려 음악에 빠져,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를 위한 소곡이 니체 최초의 작품이 되었다. 

또래들보다 조숙했던 니체는 이 시기에 이미 자신을 독일인이 아닌 세계시민이라 생각했다. 1859년에 쓴 ‘고향 없이’라는 시에 그 단초가 보인다. 

나는 공간과 스쳐 가는 시간에 한 번도 속박된 적 없이, 독수리처럼 자유롭다.” 

그런 가운데 두통은 점점 심해져 1861년 니체는 일기에 “두통에 적응하는 법을 배울 것”이라고 적었다. 심지어 청춘을 꽃피워야 할 스무 살의 마지막 날, 니체는 절망에 싸여 이렇게 썼다. 

열매는 익으면 떨어질 것이다. 익기 전이 아니라.”

 

『니체: 그의 삶과 철학』, 레지날드 J. 홀링데일, 북캠퍼스 간.
『니체: 그의 삶과 철학』, 레지날드 J. 홀링데일, 북캠퍼스 간.

본과 라이프치히, 대학시절
1864년 니체는 본 대학에 들어갔지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그러다 평소 끌렸던 리츨 교수를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가서야 다소 안정을 찾았다. 

문제의 1865년 2월, 니체는 마부의 실수로 매음굴에 들렀고, 어떤 이유에선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이는 후일 니체가 정신착란에 빠지게 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고 거론되는 사건이다. 

이 시기 니체의 사고에 중대한 전환이 일어나는데, 신학을 그만두기로 한 일이 그것이다. 

모친의 격렬한 반대도 그의 뜻을 굽힐 수 없었고, 니체는 동생 엘리자베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확신에 찬 어조로 썼다. 

믿음은 객관적 진리를 입증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네가 영혼의 평화와 행복을 원한다면, 믿어라. 하지만 네가 진리의 사도가 되고 싶다면, 질문해라.” 

니체에게 신을 부정한다는 것은 모든 종류의 논리적 비약을 거부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니체는 인간이 세계의 근원을 알지 못한다 해서 그로부터 신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비약’을 거부했다. 니체는 인간이 세계의 본질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유에서 어떤 식으로든 체계를 세워야 한다는 ‘비약’을 거부했다. 

대신 니체는 진리란 영원히 추구할 가치가 있는 무엇이라는 것, 이를 위해 인간은 자유로운 사유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믿었다.

이 무렵 접한 슈트라우스의 ‘예수의 생애’는 그의 이런 생각을 확고하게 해주었다. 

우리가 예수를(즉 예수가 신이자 인간임을) 포기한다면 신 자체도 마찬가지로 포기해야 할 것이다.

라이프치히대에서 니체는 고전 분야의 우등생이 되었고, 1866년 2월 리츨 교수는 니체가 세 학기 만에 제출한 학회 논문을 읽고 흥분 속에 니체를 불러 말했다. 

“그 방법의 엄격함이나 조사의 확실성에서 자네의 논문에 필적할 만한 논문은 여태껏 없었다네.” 

이후 리츨은 줄곧 니체에 주목해, 정식 논문도 없던 스물네 살의 제자를 바젤대 고전문헌학 교수에 추천했다. 

1865년 말 니체는 자신의 사고에 결정적 영향을 준 책,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1818년 작)를 접했다. 2년 뒤 니체는 이 책이 준 충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도대체 어떤 악령이 내게 ‘이 책을 집으로 가져가라’고 속삭였는지 모르겠다. (...) 이 책에서 나는 세계와 인생, 그리고 나 자신의 본성을 소름 끼치도록 웅장하게 비추는 거울을 보았다.” 

몇 년 동안 그는 쇼펜하우어와 하나가 된 듯한 느낌으로 보냈다. ‘의지’에 대한 해석을 달리 하기 전까지는. 

1867년 니체에게 쇼펜하우어보다 더 중요한 인물, 바그너가 나타났다. 그해 여름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을 접한 니체는 몇 개월에 걸쳐 거기에 침잠한 뒤, 동료 로데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바그너의 음악에 대해 냉정하고 비판적인 정신을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네. (...) 내 몸의 모든 조직과 모든 신경이 떨고 있다네.” 

바젤 대학의 젊은 교수
1869년 2월 니체는 리츨 교수의 추천으로 스위스 바젤 대학 교수에 임명됐고, 3월 시험 없이 연구논문만으로 박사 학위를 받는 특혜를 누렸다. 

교수직을 얻으면서 니체는 프로이센(당시 독일) 국적을 포기했고, 그럼에도 스위스 국민이 될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드러나, 결과적으로 이후 평생 무국적자가 되었다. 

하지만 너무 일찍 교직을 맡아 그의 정신과 육체에 무리가 따랐다. 꽤 인기 있던 젊은 교수 니체는 한동안 가르치는 재미와 사교계를 드나드는 재미에 빠져들었다. 

『그리스 비극 시대의 철학』(1870년), 『소크라테스와 비극』(1870) 등 몇 편의 책을 낼 정도로 왕성한 집필력을 보이기도 했다. 평생 변치 않았던 친구 프란츠 오버베크 교수를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그 2년이 니체의 삶에서 유일하게 화려했던 시절이었다. 1871년 2월 니체는 강력한 편두통을 견디지 못해 병가를 떠났다. 하지만 휴양지 루가노에서 오로지 집필에만 매달리는 바람에, 학교로 복귀할 무렵 그의 건강은 더 나빠졌다. 

어쨌든 집필은 끝났고, 바젤에 복귀한 1872년 출간한 『비극의 탄생』은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들었다. 

“그리스 문화에 대한 분석으로 시작해서 바그너의 오페라를 지지하는 것으로 끝나는”(『니체』, 홀링필드, 북캠퍼스, 139쪽) 이 책은 니체의 전기 사상을 대표하는 걸작이다. 철학적으로 보면 이 책에는 “창조는 경쟁의 산물이며, 창조적 힘이란 곧 제어되고 방향이 수정된 정념”이라는, 덜 여물었지만 후일 ‘힘’과 ‘권력의지’로 표현될 니체 사상의 맹아가 담겨 있다. 

놀라운 것은 “현상의 끊임없는 변천 속에서 영원히 창조하라!”며 생기와 열정으로 넘치는 이 책을 그가 지독한 두통을 참으면서 써냈다는 사실이다. 

이는 시작일 뿐이었다. “내가 죽지 않고 견뎌내는 것이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우상의 황혼』)”고 한 자신의 말처럼, 이후 니체는 자신의 모든 책을 이와 비슷한 환경에서 쓰게 될 것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883년 초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883년 초판

바그너와 쇼펜하우어, 열광과 결별
바젤대 교수가 되기 직전인 1868년 11월 7일, 니체는 마침 스위스 루체른 교외 트립셴에 머물고 있던 바그너를 방문했다. 

니체는 바그너와 쇼펜하우어에 관해 장시간의 대화를 나눈 뒤 그에게 완전히 빠져들었다. 니체는 당시의 나날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나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내 인생에서, 숭고한 사건들로 가득 찼던 그 심오한 나날을 버릴 수 없다...... 우리의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그의 삶에서 바그너가 차지하는 중요성은 헤아릴 수 없이 크다. 니체는 바그너에게서 쇼펜하우어가 말한 ‘천재’의 이미지를 발견했으며, ‘초인’과 ‘권력의지’ 개념의 단서를 보았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을 바그너주의의 경전이라 생각하며 썼다. ‘바이로이트 기획’이라 불리는 바그너의 웅대한 계획을 위해 대학에 휴직을 신청했고 내쳐 교수직을 버릴 생각도 했다. 

하지만 자신보다 31살이나 연상인 이 위대한 인물은 음악가, 넓게 보아도 예술가였지 니체가 찾는 사상가가 아니었다. 

니체는 바그너의 음악에 심취했고 그의 초인적 면모에 열광했으며 그와 쇼펜하우어라는 공통분모를 나눠 가졌다. 하지만 니체는 바그너에게서 그 이상의 것, 즉 진리 추구의 열정을 찾는 데 실패했다. 반대로 바그너는 니체에게 한없는 충성을 요구했다. 

니체가 그토록 열광했으며 당대에 칸트의 가장 충실한 계승자라 불리던 쇼펜하우어도 그에게 비슷한 문제를 야기했다.

쇼펜하우어는 바그너와 달리 탁월한 철학자였지만, 전통적인 이원론과 철저한 현실 부정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니체의 의구심을 증폭시켰다. 

가령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물자체’와 ‘현상’ 개념에서 ‘의지’와 ‘표상’이라는 개념을 도출하면서, 표상의 세계에 던져진 인간의 삶을 고통뿐인 것이라 보고, 의지를 부정해야 할 악(惡)이라 치부했다. 

이와 정반대로 니체에게 삶의 고통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며 인간은 의지로써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존재였다. 니체가 보기에 “세계의 총체적인 본성은 영원한 카오스(『즐거운 학문』)”지만,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딛고 설 조건이기 때문이다. 

니체가 삶을 가치 있다고 보는 철학적 이유는 그것이 본질적으로 하나의 ‘힘’이며, 인간은 사유를 통해 이 힘을 긍정적으로 발휘할 ‘의지를 지닌 존재’라 보았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니체의 생각을 “삶은 힘이며 사유는 삶을 긍정하는 능력”이라는 말로 압축했다. 

들뢰즈에 따르면 “삶이란 사유의 적극적 힘이며, 사유는 삶을 긍정하는 능력”임을 통찰한 철학자가 니체다.

니체에 힘입어 우리의 삶과 사유는 “서로를 이끌면서, 한계를 부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창조의 노력 속에서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더 나아가 니체의 '힘'과 '의지' 개념을 통해 비로소 “사유하는 것은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고까지 말했다.(『니체와 철학』, 민음사, 184쪽)

니체에 따르면 인간에게 있어 힘과 사유는 의지를 통해 삶의 긍정으로 나아간다. 바로 이 의지를 지님으로써 인간은 홀로 남겨진 세상에서도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니체의 통찰에 따라 “신은 죽었다, 하지만 의지(意志)는 인간을 위대하게 만든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힘과 의지의 개념을 새롭게 규정한 가운데 니체의 철학은 삶의 긍정을 넘어 초인과 권력의지, 궁극적으로 영원회귀 사상에 이르게 될 것이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은 뒤인 1876년, 리첼 교수가 ‘지적인 방탕(geistreiche Schwiemelei)’이라 지적한 시기를 보낸 뒤, 니체는 최종적으로 바그너와 결별했고 동시에 쇼펜하우어의 사상에도 이별을 고했다.

그해 10월 니체는 다시 휴직을 신청해 학교를 떠났지만 몸은 회복되지 않았다. 다음 달 니체는 바젤 대학을 퇴직해 휴양지로 떠났다. 

그런데 한참 요양에 전념해야 할 곳에서, 고통과 탈진으로 한때 사경을 헤매면서, 니체는 이번에도 집필에 매달렸다. 

나의 생명력이 가장 약했을 때, 나는 염세주의자이길 포기했다. 자기 회복의 본능이 궁핍과 의기소침의 철학을 금한 것이다.”(『이 사람을 보라』 1장)

이 말처럼 1878년 5월 니체는 비로소 자신의 독자적인 철학이 담긴 대작,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내놓았다. 

이를 바탕으로 5년 뒤 니체는 “나의 모든 것이 담긴 책”이라고 말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내놓았고, 이를 통해 ‘영원회귀’로 집약되는 자신의 사상을 완성했다. 그가 이전에 쓴 모든 글이 그 책으로 수렴되었고 이후에 쓴 모든 글이 그 책에서 발원했다.

『천재와 광기』, 슈테판 츠바이크, 예하 간.
『천재와 광기』, 슈테판 츠바이크, 예하 간.

평생을 따라 다닌 고독과 고통
니체의 철학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를 평생 괴롭힌 고통과 그것마저 운명으로 받아들여 영원회귀의 철학으로 승화시킨 그의 불가사의한 의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니체의 고독은 전 세계에, 시작과 끝을 잇는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있다”고 썼다. 그는 니체를 “일평생 동안, 항상 지나치리만큼 심한 고통에 시달린 인물”이라 평했다. 

츠바이크는 1871년 바젤대 병가 이후 1889년 정신적 붕괴에 이르기까지 거의 20년에 걸쳐, 니체가 조악한 월세방과 기차간을 전전하며 방랑과 은둔 속에 겪었던 궁핍과 고통과 고독을 「니체 평전」에서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요약하면 이렇다.

“니체가 묵었던 여인숙 책상은 무수한 종이와 메모지, 교정본들이 쌓여 있을 뿐, 꽃이나 장식품은 없었다. 외투 속 깊숙이 몸을 웅크리고 언 손으로, 약한 시력 때문에 안경을 두 개나 겹쳐 쓰고 글을 썼다. 두 눈에서 눈물을 줄줄 흘릴 때까지 꼼짝 않고 쓰고 또 썼다. 

실은 이렇듯 약의 효력으로 글을 쓸 수 있는 경우조차, 니체에게는 아주 드문 행운의 순간이었다. 

그보다 그는 온종일 침대에 누워 있기가 다반사였다. 종종 의식을 잃을 정도로 심한 구토와 경련에 시달렸고, 수면을 가로막는 고통 탓에 사지를 분간하지 못하기도 했다. 

누구도 그에게 글을 읽어주거나, 말하거나, 함께 웃은 적이 없었다. 그가 체류한 도시는 바뀌었지만, 그의 방은 늘 그대로였다. 매일 일만 하며 보낸 어둡고 침울한 밤이 천 번이나 지나가도, 명성의 여명은 밝아오지 않았다.

니체의 육체를 그중에서도 괴롭힌 것은 두통으로, 그로 인해 각혈과 위경련·편두통·신열·식욕부진·무력감·치질·변비·오한·식은땀·마비증세가 수시로 찾아들었다. 의사는 그가 하루 한 시간 반 이상 일할 수 없다고 진단했지만, 니체는 하루에 열 시간씩 작업했다. 

니체는 고통을 수면제로 달랬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수면제의 양도 배가되어 어느 시점이 되자 더는 듣지 않았다. 그가 20년에 걸쳐 친구와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신음을 호소하지 않은 게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다.”(『천재와 광기』, 예하, 348~351쪽 요약.)

그럼에도 니체는 1888년 말, 그의 의식이 완전히 무너지기 직전 써낸 『이 사람을 보라』에서 “전체적으로 보아 나는 최근 15년 동안 아주 건강했다”고 썼다. 

이것은 니체가 고통을 감추고자 해서가 아니라 고통을 운명으로 받아들여 승화시켰기 때문에 한 말이다. 

니체는 “나를 파괴하지 않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 말을 입증하고자 자신의 삶을 기꺼이 고통에 내맡겼다. 

이런 이유에서 니체의 모든 글은 니체 자신에게 들려준 말처럼 들리는데, 그만큼 그의 글이 진솔하고 꾸밈이 없어 그의 삶에 완벽하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니체는 삶은 살 만한 것임을 온몸으로 보여준 19세기 사상사의 프로메테우스다. 망치와 반역과 변혁이라는 도구로 신과 허무의 굴레를 깨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회복시킨 근대 지성사의 선각자이다. 

니체 이전 서양 철학자들은 철학자들을 향해 말했다. 니체는 모든 사람을 향해 말했다. 니체 이전 서양 철학은 기독교와 신에 압도되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하고, 오직 지상의 삶에 관해서만 말했다. 

다음 편에서 니체의 글을 통해 이를 확인해 본다.

 

글·김선태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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