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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개서 이야기?④ 복싱을 사랑한 여배우

자동반응의 다양한 형태들

  • 기자명 김진욱/기획위원
  • 입력 2018.12.31 09:45
  • 수정 2021.01.20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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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욱/시그널 기획위원

 

[필자주] 자소서는 필자가 2016년 모바일 앱 개발회사를 퇴직하고 인생 이모작을 준비할 즈음 우연한 계기로 <랭어 연구소>와 협업하며 진행한 한시적 프로젝트였다. 자소서에 관심을 둔 이유는 몰개성을 양산하는 교육, 어른들을 포함한 동시대인들이 가진 마인드셋(사고방식)을 반영하는 거울같았기 때문이다. 개성이 죽고 획일화된 사고가 극복되지 않은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는 어떤 사회적 변화가 있다해도 풍요한 정신적 삶은 요원할 것이다. 이 연재는 학생을 위한 글이 아니라 '자소서'를 소재로 우리들 고정관념을 반추하는 글이다(물론 자소서 작성에도 도움이 된다). 본 연재는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맥락전환의 기본원리 / 맥락전환은 쉬운가 / 자동반응 / 자동반응의 다양한 형태들 / 범주화의 오류가 초래하는 닫힌 세계 / 진실을 억압하는 통념들 / 논리와 표현 / 태도 그리고 서술 / 사실과 의견의 구분 / 싫은 삶의 대안적 가능성 / 맥락전환의 선각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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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TV 예능프로에 복싱하는 여배우가 나왔다. 선수 활동으로 화제가 된 이시영이다. 출연자가 퀴즈를 내고 맞추는 포맷. 그녀 질문은 ‘내가 복싱을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였다. 답은 '경험해보니 복싱은 생각보다 매우 안전하다'였다. 단순한 장면인데 여기에 대화나 글의 논리 구성을 판별하는 힌트가 숨어 있다. 그것은 계기와 동기, 이유를 구분하는 것이다. 이 셋은 비슷한 듯 다르다. 복싱하게 된 계기는 다이어트(동기) 혹은 건강을 위해 평소 운동할 필요(동기), 또는 누군가가 권유해서(계기), 광고 전단을 보고 호기심에(계기) 시작했을 수 있다. 아무튼 그것은 다 복싱을 하게 된 동기나 계기다. 그런데 복싱을 하다 보니 생각보다 매우 안전한 운동이라(이유) 좋아하게 된 것이다.

사전적으로 정의하면 ①계기란 어떤 일이 일어나거나 바뀌게 되는 원인이나 기회 ②동기란 어떤 일이나 행동을 일으키게 하거나 마음을 먹게 하는 원인이나 계기 ③이유란 어떤 일을 일어나게 하는 까닭이나 근거다(다음 사전). 사전적 정의는 엇비슷하나 유심히 살펴보면 조금씩 다르다. 계기에는 외부가 개입된다. 즉 외적 조건이다. 동기에는 내가 포함된다. 이유는 이 둘과 다른 차원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 근거다.

계기는 외적(누군가의 권유), 동기는 내적(운동에 대한 필요성), 이유는 전체적(복싱이 안전한 운동임) 측면에 초점이 있다. 계기는 하나의 특수한 사례, 경험이고, 이유는 개별적인 경험이 모여서 도출된 일종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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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소서를 포함해 대화에서조차 흔히 저지르는 잘못은 동기나 이유를 묻는데 계기를 답하는 것이다. 전편에서 필자는 ‘질문을 읽어야 한다’, ‘질문을 안다고 생각하고 자동 반응하면 안 된다’, ‘잘 듣고(보고)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동 반응하지 않으려면 차이에 민감해야 한다고도 했다. 예컨대 이런 질문이 있다고 하자.

“본인이 지원 학교에 관심을 두게 된 동기, 학교 입학 후 활동계획 및 졸업 후 진로 계획에 관해 구체적으로 기술하십시오”.

이에 이렇게 답변했다고 하자.

“제 꿈은 국제단체 활동입니다…어릴 때 책 XXX를 읽고 전 세계 아동에게 희망을 전해주는 국제단체 활동이 인생 목표가 되었습니다…귀 학교 교훈이 이 목표와 맞는다고 생각해 지원케 되었습니다. 블라 블라”

답에 인생 목표를 세운 '계기'는 있다. 책을 읽은 것이다. 이시영이 복싱하게 된 계기에서 계기와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러나 ‘계기’일 뿐 ‘동기나 이유’는 표현되지 않았다. 책을 읽어서 내게 일어난 변화는 구체적으로 없다. 전 세계 아동에게 희망을 전해주기 때문이라는 이유는 구체적이지 못하다. 국제단체 활동가가 됨으로써 내가 기대하는 내 변화는 무엇일까. 어떤 의미에선 그것이야말로 활동가가 되기 위한 좋은 이유가 될 수도 있다. 자소서에서는 외적 계기가 아니라 내적 동기 혹은 이유를 말해야 한다. 책을 읽고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말해야 동기가 된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 자소서란 자기> 소개 > 서술 순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서 일어난 변화가 가장 자신을 잘 드러낸다. 위에서는 주어진 계기만 말할 뿐 독서 후 일어난 변화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위 질문 항에서 ‘구체적으로 기술하라’가 수식하는 구절은 (1)지원 학교에 관심을 두게 된 동기 (2)입학 후 활동계획 (3)졸업 후 진로 모두다. 변화를 구체적으로 말해야 한다. 위에서 드러난 ‘나’는 ‘그 책을 읽은 나’만 드러나지, ‘나’가 없다. 필자도 큰 영향을 받은 책이 있다. 고 조영래 변호사가 쓴, 산업화 초기 1970년 청계천 봉제노동자의 열악한 삶을 연민하며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절규, 분신한 청년 전태일 평전이다. 취중 한 장 두 장 넘기다가 울면서 새벽까지 읽었다*. 대학 신입생 한창 예민한 시기에 충격을 받았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보편적 인간애다. 지금은 사회운동의 상징이지만, 내겐 성인으로 보였다. 참혹한 환경에 있는 어린 노동자들을 연민하던 일기장은 위대한 인간 사랑을 담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사회상에 대한 각성이다. 시골 출신으로 사회에 호기심과 치기 어린 현학적 고민을 일삼을 때인 대학 신입생 시절, 이 세계 그리고 내가 꿈꾸는 안락한 삶이 결국 누군가 노동으로 지탱되고, 그런 고민은 기실 노동을 벗어나려는 욕망에 기초한다는 것(이것은 내가 책을 재해석한 것이다)이 충격이었다. 그때 어떤 결심을 했고 그 핵심대로 살진 못했지만 곡절 끝에 대학을 11년 만에 졸업했고 평생 인식 기저를 좌우하는 자장(磁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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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사회 모순에 관심을 두게 해준 책은 말하자면 외부, 즉 ‘계기’다. 하지만 동시대를 다르게 받아들인 것은 내부, ‘나’다. 책 자체가 아니라 ‘자기’가 개재될 때, 즉 재해석하거나 다르게 반응할 때, 단지 ‘계기’가 아닌 ‘이유’가 된다(여기서 옳고 그름이 문제가 아니다. 각자 다르다는 것이 중요하다). 책을 읽고 인생 목표를 설정했다는 식은 자소서 단골 소재다. 하지만 그 과정을 드러내는 방식에 대해서는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단지 그 책을 읽어서가 아니라, 책을 읽음으로써, 그리고 그 이후 변화를 잘 관찰하고 드러내야 공감이 된다. 한편 이시영의 자문자답에는 이유와 계기뿐만 아니라 대화나 글에서 흔히 접하는 ‘주장과 근거’라는 틀도 숨어 있다. 

‘복싱은 안전한 운동이다’라고 하면서(주장) 그 이유로 ‘내가 경험해 보니 복싱은 생각보다 안전했다는 자기 경험(근거)을 내세우고 있다. 이런 주장과 근거로 구성된 문장은 자소서든 또는 다른 무엇이든 논리적 서술구조에서는 늘 등장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편 브래드 피트의 인터뷰를 참고할 것을 권한다. 주장, 근거, 계기, 이유 이런 범주는 글을 읽을 때 일종의 ‘필터’라고도 할 수 있다. 필터를 통해 사물을 보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새롭게 보이듯 이 필터로 들여다보면 글 이나 말 구조가 훨씬 더 잘 보이게 된다. 요컨대 위에서 배우 이시영은 근거 즉 이유를 말했고, 위 자소서 화자는 계기만 말하고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계기, 동기, 이유를 헷갈리는 것은 질문에 자동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지는 이것이다. 계기를 말하지 말고 이유를 말하라. 더 확장하면 이것이다. “자동반응하지 마라. 모든 것들에”

 

덧. 아래는 고 조영래 변호사가 아들에게 보낸 엽서이다.

이미지/조영래 변호사가 아들에게 보낸 엽서
이미지/조영래 변호사가 아들에게 보낸 엽서

“앞의 사진은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다.
아빠가 어렸을 때는 이 건물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었다.
아빠는 네가 이 건물처럼 높아지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돈 많은 사람이 되거나 제일 유명한 사람, 높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작으면서도 아름답고,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건물이 얼마든지 있듯이 – 인생도 그런 것이다.
건강하게, 성실하게, 즐겁게, 하루하루 기쁨을 느끼고 또 남에게도 기쁨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실은 그것이야말로 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처럼 높은 소망인지도 모르겠지만”

 

*여담: 내가 전태일 평전을 읽은 날은 날짜까지 기억난다. 1985년 5월 23일이다. 그날 미 문화원 점거농성으로 유치장에 간 과 선배를 면회하고 와서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가면서 밤 9시쯤 책을 샀다. 사회과학 서점<풀무질>에서 였는데, 설립자는 학교 선배이기도 한, 지금 이 매체 <시그널미디어협동조합> 조승문 이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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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1985~1996년 성균관대 졸. 전 인포허브, 네오엠텔 본부장 등 모바일IT업계 19년 근무. 스토리텔링 회사 <꿈틀> 기획이사를 거쳐 현 미니기업 <투와캠프> 운영 및 자영업. 꿈틀 재직 시 엘렌 랭어의 한국인 제자들이 설립한 연구소 <엘 엠 아이 코리아>와 협업, 랭어 긍정심리학을 기반한 <마인드풀 자소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메가스터디 윈터스쿨> <알로곤 학원> 등에서 강사 학생을 대상으로 강의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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